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Live Life

직업으로서의 학문

suhgo 2020. 3. 2. 01:19

얇은 책이니 가볍게 읽어볼까 했다가 며칠간 버거웠다
10대나 20대였다면 달랐을까
마치 녹이 슨 폐기기가 된 것 같았다
책의 분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필사(筆寫)가 많았던 건
깊은 공감이라기보다
기름칠이라도 해 이해하려는 필사(必死)의 노력
1917년 강연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
물론 읽고 난 후의 성취감은 있었음 
 
pp. 54-55
아브라함이든 또는 고대의 어떤 다른 농부든 간에 그들은 <늙었지만 생(生)을 살 만큼 살았다>는 느낌, 즉 생에 대한 포만감을 가지고 죽었습니다.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의 유기적 순환 속에 있었고, 또한 그들의 인생은 그들에게 의미의 차원에서도 말년에는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고, 또한 그들이 풀고 싶은 수수께끼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제 생은 이것으로 <충분하다>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. 그러나 문명이 사상, 지식 또는 제반 문제들로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은 <생에 지칠> 수는 있어도, 생애 대한 포만감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. 
 
근대에 비해 엄청나게 길어진 생이지만
많은 순간 무기력하고
내 생각이 정말 내 생각인지 모호하며
빨리빨리 해치우라 끝없이 몰아치는 다음 단계에 숨이 찬
지금 여기의 포만감은 어떨까 
 
pp. 89-90
그가 세계관 및 당파적 견해들의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낀다면 바깥 인생의 시장에서는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.(중략) 그러나 참석자들, 그것도 어쩌면 자신과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참석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, 즉 강의실에서 교수가 신념 고백자로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안일한 태도입니다. 
 
p. 96
"악마, 그는 늙었다. 그러므로 그를 이해하려면 너도 늙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라" (괴테의 <파우스트> 제 2부 제 2막. '악마'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) (중략) 악마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오늘날 매우 흔히 일어나는 바와 같이 '악마', 즉 '학문'이라는 악마 앞에서 달아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의 길을 일단 먼저 끝까지 파악해야만 비로소 그의 힘과 한계를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. 
 

 

베버는 설교자로서의 기대를 잘 알고 있었지만, 엄격한 지적 금욕주의를 실천하며 의도적으로 냉철하고 냉정한 학자의 자세로 일관함. (옮긴이 서문)

ⓒ suh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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